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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전쟁/리뷰 & 보도

[리뷰] 국가와 자본이 당신에게 보내는 선전포고


원문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00311160147&section=02

국가와 자본이 당신에게 보내는 선전포고
: 다큐멘터리"당신과 나의 전쟁"에 대해


노동자라는 유령


나는 파업을 모른다.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도 파업을 모른다. 사실 일반적인 인식 속에서 파업은 이미 ‘밥그릇싸움’이라는 대체 개념으로 정립되어 있다. 덕분에 노조의 빨간 조끼는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모여든 광장에서도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 더불어 촛불정국에서 파업을 했던 몇몇 노조들이 시위대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시민들은 광장 밖으로 나가는 것을 거부했다.


게다가 파업은 불편하다. 정체되는 도로, 시끄러운 노랫소리, 그리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세련된 민주시민이라면 누구라도 손발이 오그라듬을 느끼며 몸서리를 칠 고색창연한 투쟁적 분위기. 간혹 빨간 조끼를 입고 여의도의 최신식 빌딩 앞에 모여 앉아 연좌농성을 펼치는 노조들은 여의도 공원을 거니는 젊은 남녀나, 정장을 입은 회사원들과는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무엇보다도, 글쎄...“노동자”라니.


오늘날 우리들의 세상은 그 누구도 노동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 세상이다. 우리들이 꿈꾸는 것은 전에 넣어둔 펀드가 대박이 나거나, 지금 살고 있는 집이 뉴타운이 되거나, 로또에 당첨되어 하루빨리 노동자신세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젊은이들과 그들의 부모들은 무슨 수를 동원해서라도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심지어 좋은 대학이 아니라도 대학을 가는 것이 사람대접을 받고, 부모들처럼 살지 않는 길이라고 믿기에 이 사회는 대학진학률 90%라는 놀라운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노동자 없는’ 사회를 살고 있다. 이것은 노동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촛불은 노동자를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마찬가지로 정권의 “언론장악음모”에 맞서는 MBC의 노조원들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파업도 대중에게 허가받지 못했다. 정권과 자본에게는 물론이고, 대중으로부터도 외면당한 노동자라는 자리를 지키고 있을 사람은 별로 없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되 그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노동자가 아닌 사회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언젠가부터 다시 노동자들이 등장하고 있다.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이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자본과 국가로부터 “너는 노동자가 아니다.”라고 통보를 받은 사람들이다. 이 노동자들은 KTX, 기륭전자, 동희오토, 홈에버 같은 곳들에서 속속들이 등장했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지상의 스튜어디스, 건실한 중소기업의 근로자, 가정에 보탬이 되고자 했던 주부들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노동자로 거듭난 것이다.



전쟁의 시작


쌍용자동차에서 벌어진 ‘전쟁’역시 그렇다. 《당신과 나의 전쟁은》회사의 정리해고 통보를 받고 노동자가 되었던 이들에 대한 기록이다. 77일간 계속되었던 옥쇄파업은 자본도, 국가도, 대중도, 심지어 진보진영의 일부도 지지하지 않았던 파업이다. 그러나 그 조합원들마저도 “이건 노조도 아니”라고 생각했다던 쌍용자동차노조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않고,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기간을 버텨냈다.


쌍용자동차가 상하이자동차에 매각된 후 상하이 자동차는 약속한 투자를 하지 않고 필요한 기술들만을 빼돌린 채 쌍용차를 버렸다. 법정관리에 들어간 쌍용자동차의 경영진은 회생안으로 대규모의 정리해고 계획을 내놓았다. 그래서 14년간 결근도 없이 근속을 해서 “너는 제사도 안 지내냐?”는 핀잔을 들었다던 이를 포함한 20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해고대상자가 되었다.


그래서 노조의 파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측은 재협상대신 용역을 부르고, 파업에 참여하지 않았던 “산자”들을 불러내고, 경찰을 불러서 대응했다. 마스크와 두건으로 얼굴을 칭칭 동여매도 금방 알아볼 만큼 가까운 동료들이 회사를 옹호하는 관제데모를 벌였다. 아들만한 나이쯤 되는 용역들이 사방에서 새총으로 볼트를 쏘아댔다. 용역이 가져온 방송차는 밤낮으로 <오! 필승코리아!>를 틀어대고, 그러는 동안 공장 안에는 물, 전기, 식량, 의약품이 끊겼다.


경찰의 헬리콥터가 폭격처럼 내리꽂는 최루액에 맞은 사람들은 머리털이 빠지고 피부에 물집이 잡혔다. 최루액이 안전하다고 주장하려던 경찰의 실험은 최루액이 스티로폼을 녹이는 바람에 코미디로 끝났다. 그사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고 거리가 노란색으로 넘쳐났지만, 그것은 쌍용을 더더욱 외로운 섬으로 만들었다. 사측에서 제안한 마지막 협상에 사람들은 희망을 걸었지만 사측은 완고했다. 그리고 결국 이 파업에 종지부를 찍을 경찰 특공대가 등장했다.


사방에서 무장한 진압대가 들이닥친다. 머리위에선 헬기가 괴물 같은 소리를 내며 저공비행을 하고, 소방호스는 제 사용가치를 망각한 채 사람들을 향해 몽둥이 같은 물줄기를 뿜어댄다. 용역들이 시시덕거리며 수십일 동안 쏘아댄 볼트들은 이리저리 도망치는 사람들의 발에 채여 요란스런 소리를 낸다. 옥상을 지키던 사람들이 매를 맞고, 도망치고, 비명을 지르고, 오열하고, 쌍욕을 하는 동안 저 멀리 어딘가 에서는 노랫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오~! 필승코리아! 오~! 필승코리아! 오~! 필승코리아! 오 오 오 오 오.”



산자여, 따르게 될 것이다


이들은 “오~! 필승코리아!”의 구성원이 아니다. 이들은 그냥 “노동자”다. 회사가 어려운데 자기만 살겠다고 77일 동안이나 파업을 해서 막대한 피해를 끼친 노동자 말이다. 공장이 멀쩡히 돌아가고 자신들이 열심히 일하는데도 회사가 자신들을 그냥 내쫓을 수도 있다는 이상한 사실을 깨달은 노동자다. 그렇게 해서 쫓겨난 공장정문에 전자식 출입관리기가 설치되고 결코 그 안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싸움을 끝내지 못하는 노동자. 이 싸움으로 가장 많이 상처입고, 박탈당하고, 외면당했던 노동자. 그래서 다른 곳에서 노동자가 되어가고 있는 이들을 위해 함께 싸울 것을 다짐하는 그런 노동자다.


우리에게 이들의 존재는 외면하고 싶은 것일 테지만, 아쉽게도 한국사회는 더욱더 많은 노동자들의 탄생을 준비하고 있다. 공장이 낯선 이들이라도 걱정할 것 없다. 혹은 대졸자도 걱정할 필요 없다. 자기 스스로를 경영하고 싶은 똑똑한 젊은이들이나, 착실히 커리어를 쌓아서 프로가 되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야무진 꿈을 가진 나의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이기적으로 살려고 해도, 앞만 보고 나아가려고 해도, 그곳에 길 자체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영혼이라도 팔고 싶다고 말 할 수도 있겠지만, 엄혹한 수요-공급의 법칙에 따라 영혼의 가격은 계속해서 하한가를 치는 중이다.


결국 우리는 이 “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방적인 선전포고는 자본과 국가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우리를 모조리 죽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우리의 노동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온갖 도표와 수치들을 우리에게 들이밀며 어려운 말로 설명하고는 “죽지 않을 만큼”을 던져주고 이것이 아니면 별수 없다고 뒷짐을 진다. 그러나 그들이 스스로 만든 경제적 가상을 두고 게임을 벌이는 것에 우리가 맞장구를 쳐야하는가? 명백하게도 우리들의 대부분은 경영자가 되지 못하고 노동자로 살아갈 것이다. 우리들의 대부분은 부동산을 갖지 못하고 세입자로 살아갈 것이다. 우리들의 대부분은 자산가가 되지 못하고 월급 생활자로 살아갈 것이다. 우리들의 대부분은 심지어 정규직도 되지 못하고 비정규직으로 살아갈 것이다. 이것들을 계속해서 외면한다면 우리는 결국 다른 모든 노동자처럼 더 이상 노동을 할 수 없을 때에 비로소 “노동자”가 될 것이다.


아쉽게도 이 선전포고를 피해갈 방법은 없다. 거의 모든 것이 저들의 손에 있고, 우리에게는 게임의 룰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아직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을 빼앗기기 전에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최태섭 / 칼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