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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 노동자 파업/파업, 그 후

[쌍용자동차 파업, 그 후③] 그 녀들의 싸움은 77일이 끝난 후 시작됐다


그녀들의 싸움은 77일이 끝난 후 시작됐다
[쌍용자동차 파업, 그 후③] 세상의 중심에 있었던 아내들 이야기


이 연속기획은 쌍용 자동차 투쟁을 반추하고, 그 현재를 되새기기 위하여 기획되었습니다. 3월 2일부터 4월 5일까지 총 1달간 진보매체와 공동으로 진행됩니다. 이번 기획 기고 사업은 미행美行이 기획하고, "당신과 나의 전쟁" 제작위원회 소속 단체 및 쌍용 투쟁의 주체 그리고 활동가, 르포작가, 교수, 작가, 블로거 등 쌍용 자동차 투쟁의 현재를 고민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참여로 진행됩니다. 각 기사의 저작권은 해당 필자에게 있으며, 사진의 저작권은 각 언론사 및 사진 제공자에게 있습니다. (사진 저작권은 캡션 참조)  [미행美行]

원문
프레시안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00309141741&Section=02&page=1
레디앙 :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7574
참세상 :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55903
미디어충청 : http://www.cmedia.or.kr/news/view.php?board=news&nid=5476

2009년 8월 6일, 쌍용 자동차 노동자들은 77일간의 옥쇄 파업을 마치고 공장 문을 나섰다. 직접적으로는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의 여파로 시작된 자동차산업의 구조조정, 더 원인을 파고 들어가면 외환위기 이후 본격화된 해외자본의 국내기업 인수의 예고된 비극, 노동자 입장에서 따지면 한국사회에 깊게 뿌리 내린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성에 낳은 칼바람이었던 쌍용차 사태는 한국사회에서 큰 상징성을 갖고 있다. 그로부터 200여 일이 지난 지금 파업 참가 노동자들은, 쌍용 공장은, 그리고 우리 사회는 어디쯤에 서 있는 것일까?

미행(美行)과 쌍용 파업 참여 노동자, 가족들 그리고 금속노조를 비롯한 다양한 노동, 정치, 사회 단체들과 현장 활동가, 르포작가, 교수, 작가, 블로거 등 다양한 사람들이 각각의 관점에서 오늘을 진단해본다. "파업 그 후"부터 "88만원 세대와 쌍용"을 거쳐, "한국 사회와 노동자 파업"에 이르기까지 그들과 우리가 처한 오늘을 기록한다. 편집자


집 앞 슈퍼를 가는 것도 걱정인 이들의 215일의 전쟁

쌍용 다방, 쌍용 이발소, 쌍용 모텔…… 쌍용의 명칭을 단 가게들을 지나쳐 아파트 단지에 다다랐다. 단지 내 1500세대 중 150세대가 쌍용에 근무하거나 근무했던 이들이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 복도 어딘가에서 어색한 인사조차 건네지 못하고 서로를 외면하는 이웃이 있다. '쌍용 가족'으로 불리던 이들은 그 여름 산 자와 죽은 자, 파업 참가자와 구사대로 나뉘었다.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뀐 그곳에서는 산 자도 죽은 자도 변해버린 저마다의 삶을 부둥켜안고 있다.

"사실은 좀 겁나더라고요 어떻게 마주볼까. 내 쪽에서 먼저 보면 못 본 척 지나가기도 하지만, 안 만날 수가 없어요. 엘리베이터 타면 보는데 일부러 회사 이야기는 안 하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냥 넘어져서 쪽팔린데 최대한 안 아픈 거처럼 그러고 사는 거죠."

쌍용자동차 가족대책위원회(이하 가대위) 회원 권지영 씨는 집 앞 슈퍼를 가는 것도 걱정이다. 파업에 등을 돌렸던 이들, 사측의 관제데모에 나오던 남편의 동료들과 그 가족들을 곳곳에서 마주칠 수밖에 없다. 그녀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평택은 벗어나고만 싶은 곳이 되었다.

" 어딜 갔다가 평택으로 들어서는데 숨이 탁 막히는 거예요. 운전하고 있는 신랑한테 안 들어가면 안 될까라고 했어요. 떠나고 싶죠. 아직 일도 해결 안 됐고, 부모님도 여기 계시고, 시아버님도 편찮으시고 하니까 못 떠나는 거죠. 서울에 있다가 이쪽으로 남편이 지원을 해서 내려온 거거든요, 고향이라서."(김경아, 가명)

평택 시내는 한가로웠다. 그러나 공장 밖으로 내몰린 이들의 삶은 새로운 전쟁이었다. 그/녀들의 싸움은 77일간의 기나긴 파업이 끝난 후부터 시작되었다.

▲ '쌍용 가족'으로 불리던 이들은 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해왔던 이들은 그 여름 산 자와 죽은 자, 파업 참가자와 구사대로 나뉘었다. ⓒ쌍용차 가족대책위

"애들 유치원 보내고 밥해 먹이고 집안일 하는 게 소원이었다"

"공장에 헬기가 뜨고 최루액을 떨어트리고 새총을 쏘고. 해고가 될까봐, 질까봐 그런 차원이 아니라 저러다 죽을까 봐, 목숨을 걱정해야 하는 싸움이 된 거예요. 이건 못하겠다, 이건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독했어요. 이 사람들이 우리에게 욕하고 파이프 들고 이러는 게 무서운 것보다 이런 상황이 연출되는구나, 그게 너무 끔찍했어요." (권지영)

" 하루에도 열두 번 그만 두고 싶었죠. 내일은 끝나지 않을까 이런 기대로 자꾸 자꾸 버틴 거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소원이었어요. 그때는 다른 사람들처럼 애들 유치원 보내고 밥해 먹이고 간식 먹이고 집안일 하고 사는 게 소원이었어요." (이정아 가대위 전 대표)


그녀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파업이 끝나면 예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갈 줄 알았다고.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파업 주동자라며 정부는 남편들을 구속했다. 구속을 면한 남편들은 실업자가 됐다. 물도 반입되지 않던 공장 점거와 수감생활을 거치며 피폐해진 몸, 쌍용 노동자라는 낙인 등으로 인해 대부분 중년에 이른 그들은 노동 시장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그녀들은 생계라는 무거운 짐을 홀로 져야 했다.

"남편이 나와서도 힘들어 하더라고요. 경찰 조사에 계속 불려 다니고, 강압적인 분위기에 눌리잖아요. 대라, 불어라, 누구는 다 불었다 무방비하게 동료를 팔아먹고 밀고해야 하는 상황에서 노출되니까 힘들어하더라고요. 그런 상황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고."(권지영)

10년 넘게 사회와 단절되었던 그녀들의 새로운 외출

"공장에서 거의 한달 넘게 밤마다 헬기가 뜨고 전경이 방패 두드리고 소리 지르고, 우리도 그걸 다 듣고 있었는데 안에 있던 사람은 어떻겠어요. 하도 시달려서 신랑이 집에 와서도 잠을 못 잤어요. 새벽 3시만 되면 깨가지고 사람이 멍하게 있지 않나. 남편도 가족들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버티려고는 하는데, 제가 이것저것 서둘러 일을 알아봤죠."


8 시 반, 한숙희(가명) 씨는 잔업을 끝내고 초등학생 자녀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발걸음을 서두른다. 잔업까지 해서 받는 월급은 120만 원이다. 예전 같으면 반절이 두 아이 학원비로 들어갔을 돈이다. 아이들은 학원을 끊었다. 집은 월세로 옮겼다. 갚지 못한 빚은 이자가 불어갔다.

주 야간 맞교대 근무를 하는 남편의 생활방식에 맞추고 어린 자녀들을 키우느라 길게는 십여 년을 사회와 단절되었던 그녀들이 일을 찾아 나섰다. 여성 일자리 창출이라는 명목 하에 시민단체에서 그녀들을 고용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한시적인 일자리다. 그녀들의 얼굴에 짙은 기미가 앉는다. 입에서는 단내가 난다. 그러나 그녀들을 지치게 하는 건 몸의 피로가 아니다.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봤던 쌍용 광고인데 요즘은 마음에 와서 탁 박혀요. 쌍용이라는 글자만 봐도 회사 근처에만 가도, 만감이 교차해요. 오늘도 아기를 재우면서 창밖을 보는데, 쌍용 자동차가 어디쯤인가 그 생각을 하는 거예요. 창밖을 보면 항상 그래요. 싸움이 막바지로 치달을 때 불낸다 하고, 타이어 태우고 이런 일이 많았잖아요. 아침에 일어나서 창밖을 보는데 산 저 건너편으로 시커먼 연기가 올라오더라고요. 그걸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는데, 그 기억 때문에 싸움이 끝난 후에도 창밖을 보면 쌍용 자동차에서 연기가 나지 않나 살펴요."(이정아)

"파업이 끝나고 나서 그냥 살았죠. 애가 있으니까 밥을 먹어야 하고 잠을 자야하고 애를 학교에 보내야 하니까 돈을 벌고 그렇게 살았죠. 살아지는데 어느 순간, 설명하지 못하겠는데 내 안에서 화가 나는 거예요. 서러운 느낌, 막연한 느낌이 들면서 눈물이 확 쏟아지는 거예요. 남편이 해고돼서? 아니에요. 파업에 져서? 그것도 아니에요. 다 아닌데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돼서 눈물이 나는 거예요. 지독한 느낌이 드는 거예요. 정말 개미처럼 밟히는구나, 삶이 한순간 파탄나는 구나."(권지영)


말 수가 없어지고 낯을 가리고 쉽게 우울해지는 아이들의 상처

그녀들의 가슴에 더 큰 상처를 주는 건 아이들이다. 파업 중에 당장 맡길 곳이 없는 아이를 공장 앞으로 데려 갈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벌어졌던 폭력은 아이들의 뇌리에 깊이 남았다. 아이들은 말수가 없어졌고 낯을 가렸고 쉽게 우울해졌다.

▲ 그녀들의 가슴에 더 큰 상처를 주는 건 아이들이다. 파업 중에 당장 맡길 곳이 없는 아이를 공장 앞으로 데려 갈 수밖에 없었다. ⓒ프레시안(여정민)

"공장에 있다 집에 오면 아이가 방패 놀이를 하는 거예요. 전경 흉내를 내면서 전경들 구령 외치고, 방패로 바닥 팡팡 찧고 이런 흉내를 내요. 곤봉 같은 막대기가 있으면 꼭 주워 들고, 헬멧 쓰고, 한여름에 아이가 부츠를 계속 신고 다녔어요. 경찰을 그렇게 무서워하면서도 경찰이 우리를 막았듯이 집안에 있는 큰 장난감들로 방을 막고 바리케이드를 쌓아요. 그런 거 아니겠어요? 현실에서는 너무 두려운 경찰이지만 집은 안전한 공간이니 내가 그 권력을 누려보는 거죠. 그러면서 스스로 보상을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한번은 경찰이 우리 앞에서 시위대를 다 잡아갔거든요. 최루탄 뿌려지는 것도 다 봤고, 사진 기자 맞는 것도 봤고. 시커먼 경찰이 다닥다닥 뛰어가는걸 보면서 어른도 무섭잖아요? 저도 눈물이 날 정도로 무서웠는데, 애가 그때부터 배앓이를 하는 거예요. 윗배 아랫배 번갈아 가면서. 한의사한테 물어봤더니 애가 겁을 먹었데요. 겁이라는 에너지가 아이를 한번 둘러쌓고 있다고 나중에 커서 극복해야 한다고." (이자영 가대위 대표)


누적된 피로,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가족들의 내면에 쌓여갔다. 많은 이들이 인터뷰를 거절했다. 시간이 없다고, 이미 많은 인터뷰를 했다고, 남편이 반대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직이 덧붙였다.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그녀들에게는 기억은 고통이고 그 고통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다 해결됐으면 옛날이야기처럼 할 텐데…… 아니잖아요. 잊어먹고 살고 싶어요. 웬만하면 뉴스도 안 봐요. 신문도 절대 안 보고 그러고 살아요. 눈물은 나요. 그런데 울어봤자 뭐하겠어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이 싸움이 언제 끝날까만 생각하죠."(한숙희)

"마치 무늬는 잘 짜인 큐브처럼 돌아가는 걸로 보이지만 지금도 어느 집 어딘가에선 남들에게 들리지 않아도, 삐걱대는 소리를 내고 있지 않을까. 내가 그러니까 아마 남들도 다 그럴 텐데, 아내들도 다 그럴 텐데, 못 꺼내놓고 못 열어보고 그저 눌러놓고만 있는 건 아닐까 그래요."(권지영)


77일간의 싸움을 후회하냐고 물어보았다.

"후회는 안 해요. 너무 억울했으니까. 남편보고 포기해라, 새로운 직장을 잡고 현실적으로 살자고 이야기하기에는 저 역시도 풀리지 않은 응어리가 있어요. 쌍용 아니면 다닐 직장이 없어서가 아니에요. 우리는 너무 정당하고 상식적인 싸움을 한 것뿐인데, 회사가 어려울 때 같이 밥 한 공기 먹던 걸 줄여 반 공기씩 먹으며 같이 살자고 한 건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해고시켰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어요. 우리가 싸웠던 게 너무도 정당했다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이정아)

▲한숙희 씨는 연두색 가대위 옷을 서랍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와 아이들은 이연두색 티셔츠를 벗지 못하고 여름을 보냈다.ⓒ쌍용차 가족대책위
한숙희 씨는 연두색 가대위 옷을 서랍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와 아이들은 이연두색 티셔츠를 벗지 못하고 여름을 보냈다.

" 애들이 그 옷을 보고 물어요. 엄마 이거 버릴 거야? 저는 그러죠. 버릴 수는 없다. 이게 어떤 옷인데. 이거는 너희 아빠가 7년 동안 다닌 회사하고 바꾼 옷이다. 다시 입을 수 있냐고요? 솔직히 말하면 못 입고 나가죠. 그래도 다시 입으라고 하면, 과감하게 입고 나가서 싸우라고 하면…… 싸우고 싶어요, 솔직히 심정은."(한숙희)

파업 기간 동안 그녀들은 땀에 전 연두색 티셔츠를 입고 평택과 서울을 누볐다. 그녀들의 말대로 안 만나본 사람, 안 가본 곳이 없었다. 공장 안에서 움직일 수 없는 조합원들을 대신해서 그녀들이 손과 발이 되어야 했고, 눈과 입이 되어야 했다.

남편의 파업으로 되찾은 그녀들의 이름, 77일이 바꿔놓은 것들

"결혼하고 애를 낳고 누구 집사람, 누구 엄마로 불렀잖아요. 하지만 가대위하면서부터 정아야 누구야 라고 서로 불렀어요. 내 이름을 찾은 거예요. 다들 기뻐했던 거 같아요. 내가 할 일이 있구나. 내가 평범하지 않는 무언가를 할 수 있구나. 존재감을 많이 찾았죠."(이정아)

"같은 아파트에 사는 어떤 엄마가 그러더라고요. 요즘은 길에서 마사지 홍보 선전물을 줘도 받는다는 거예요. 내가 그때 거절당했던 경험 때문에. 여태껏 한 번도 파업하는 노동자에게 관심이 없었거니와 철도 파업한다하면 '아, 짜증나 지하철 타야 하는데' 그러고 말았는데 요즘은 다 하나하나 귀에 들린다는 거예요. 누구나 이렇게 될 수 있다, 어느 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고 내 요구가 가볍게 짓밟힐 수 있고 맞는 말을 하는데도 억울하게 당할 수 있겠구나 하면서 머리를 딱 맞은 거 같다고 그러더라고요."(권지영)


파 업이 끝나고 그녀들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파업 두 달 동안 동고동락 하던 이들이지만, 이제는 생활에 치여 가끔 얼굴을 볼 뿐이었다. 그러나 가대위 활동을 하며 겪은 변화로 인해 그녀들에게 일상은 예전과 같지 않다.

"바뀐 것들이 있죠. 이런 거예요. 전에는 회사 동료랑 가족들이랑 밥을 먹으면 남자들은 남자들끼리 회사 이야기를 하고, 아내들은 아내들끼리 모여 애들 이야기를 해요. 지금은 가대위나 조합원들이 같이 앉아서 형수님 힘드시죠 이러면서 파업 때 이야기를 하고 앞으로 노동조합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같이 의논해요. 실제 그 자리에서 논의가 안 되더라도 예전처럼 그렇게 따로 나뉘어서 이야기하지는 않는 거죠.

엄마들도 남편이 조합 활동을 한다고 하면 싫어하고 이해를 못 했는데 세상과 부딪히면서 인식이 달라졌어요. 이제는 남편들과 그런 대화를 같이 하는 거죠. 남편들도 부인 보는 눈이 달라졌고요. 가대위 활동을 보면서, 내 부인이 저런 힘이 있구나 놀랬다고나 할까? 함부로 보이지 않는 거죠."(권지영)


가대위 대표를 맡고 있는 이자영 씨는 파업 당시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반짝이던 눈을 잊지 못한다. 돈 버는 재미, 내 아이 크는 재미로만 살다가 파업을 겪으며 달라진 그/녀들의 모습이었다.

▲ 가대위 대표를 맡고 있는 이자영 씨는 파업 당시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반짝이던 눈을 잊지 못한다. 돈 버는 재미, 내 아이 크는 재미로만 살다가 파업을 겪으며 달라진 그/녀들의 모습이었다ⓒ프레시안(여정민)

"공장을 나오기 직전에 조합원들이 인터뷰를 한 걸 봤는데 정말 큰 경험이었다, 다음에 하면 더 잘할 수 있겠다고 말을 해요. 경찰 진압 직전이었고, 교섭이 반 이상을 내준 결과인데도 저렇게 웃으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건 뭔가. 저 사람 가슴에 뭐가 차있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우린 모두 훌륭했어요. 그걸 잊지 않게 이야기해 줘야 해요."

가대위에서 마련한 심리치료와 방과 후 학교 등은 참가자가 부족해 번번이 무산된다. 이런 활동들은 당장 내 앞에 맞닥뜨린 생활의 시급함으로 인해 뒤로 밀려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로의 가대위는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이자영 씨는 말한다.

"각자 각자가 정도 차이는 있지만 다들 보살핌을 듬뿍 받아야 할 존재예요. 서로가 서로를 보살펴 줘야 해요. 외로움과 허기를 채우기 위해 만나고 이야기 하고. 파업 동안에 얻은 게 있잖아요. 변화된 생각과 시선이 일상을 돌아가면서 사라지지 않게 부부 교실도 열고 자녀 교육에 대한 이야기도 같이 하고. 아이들에게 이 문화가 대물림 되잖아요. 그게 평생 남는 거라 생각해요."

인터뷰를 하러 간 날, 평택역에서 쌍용자동차 노동조합이 시민들에게 유인물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파업 참가자들이 사라진 곳에 세워진 노동조합이다. 그들은 지난 파업을 '과오'라 부르며 정부와 은행에게 자금을 구걸한다. 보수 언론은 불법 파업 주동자들을 쉽게 풀어준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내보낸다. 중공업을 필두로 대공장에서는 대량 해고와 비정규직 전환으로 이어질 구조조정이 시작되고 있다.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이정아 씨는 엄마 뱃속에서 77일간의 치열했던 싸움을 함께 한 아이를 지난가을에 출산했다. 아이 이름은 '가온'이다.

"세상의 중심이란 이름이에요. 이름을 찾는데 세상의 중심이라는 이름이 제일 마음에 와 닿더라고요. 2009년 여름에 우리는 세상의 중심에, 소용돌이 속에 서 있었던 같아요."

윤희정 / 르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