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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 노동자 파업/기사 스크랩 (2010년)

[펌-노동사회연구소] 쌍용차 노동자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투쟁은 다시 시작된다


쌍용차 노동자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투쟁은 다시 시작된다

글쓴이 손미아|편집위원

쌍용자 동차 노동자들에게 2010년은 새로운 투쟁을 시작하는 해이다. 2009년 12월 30일 평택역근처에서 조촐하게 열린 송년회는 새로운 의지를 다지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 글은 이 겨울의 혹한기를 묵묵히 견디며, 새롭게 투쟁을 준비하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의지를 그대로 싣는다.


1. 77일 그 이후, 옥쇄파업에 참가했던 노동자들은 어떻게 살았나?

(1) 구속과 손배가압류 등으로 끝없이 몰아쳐온 사측과 공권력의 폭력

2009 년 8월 6일, 77일간 비타협적인 투쟁을 전개했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이명박 정부와 쌍용 사측의 살인적인 폭력에 의해 옥쇄파업을 중단해야 했던 그 날 이후, 노동자들에게 5개월은 가히 인고의 세월이었다. 사측은 노노갈등을 유발시키면서, 정리해고자, 무급휴직자, 징계자로 갈라치기하고 분리시켰다. 8월 6일 이후 976명 중에서 52%의 인원은 이미 정리해고를 당했고, 나머지 48%인 467명의 무급휴직자들 중에서도 약 150여명에 가까운 동지들이 또 다시 사측의 강요에 의해 희망퇴직서를 써야만 했다. 2009년에 희망퇴직당한 노동자를 모두 포함하면 그 숫자는 1600명이 넘는다고 한다. 또한 지난 11월 19일에는 비해고자, 소위 '산 자' 중에서 옥쇄파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144명이 징계를 받았는데 144명 중에서 34명이 징계해고를 당했고, 60명이 정직을 당했다고 한다.1)

그러나 정리해고, 무급휴직, 그리고 징계를 받은 이들 노동자들은 이 혹한에도 쌍용을 떠나지 못하고, 또 다시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2009 년 8월 6일 옥쇄파업투쟁이 끝나자, 구속된 노동자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남아있는 노동자들에게조차 사측과 경찰은 옥쇄파업투쟁 때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폭력을 가하고 있다. 이러한 사측과 공권력의 폭력으로 인해, 끝까지 쌍용에 남으려고 했던 많은 노동자들이 결국은 노동현장을 떠나기도 했다.

" 떠났어요. 쌍용이 싫다고. 쌍용이 싫은 이유는 회사 측의 손배가압류, 경찰의 폭압수사, 이게 정말 폭력적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예요. 정말 이명박 정부의 광기와 악취를 내는 탄압이 이처럼 치밀할 줄은 상상을 못한 것이죠. 지금 손배가압류가 500억에 달하고 있어요. 그래서 많은 동지들이 77일간 투쟁을 했지만,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쌍용을 버린 거죠 (정특위, 이용호동지)."

" 옥쇄투쟁 때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많은 동지들이 절망을 하고, 그 중에 많은 동지들이 희망퇴직서를 냈어요. 어쨋든 그렇게 투쟁했던 동지들이 많이 실망하고 많이 절망하고 쌍용차에 대해서 질렸다는게.....(쌍차 비정규직 지회 유제선 조직부장)"

차라리 해고된 노동자들의 마음이 편할지도 모르겠다. 무급휴직당한 노동자와 징계당한 노동자들은 마치 자본의 보이지 않는 사슬에 목줄이 걸린 듯, 투쟁하는 노동자로 살아갈 수 없게 되는 상황에까지 몰리게 되었다. 사측은 투쟁을 하거나 심지어 조합비를 내더라도 그 즉시 해고하겠다고 무급휴직당한 노동자와 징계당한 노동자들을 협박했다. 약속했던 기간인 2010년 3월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도 계속적으로 정리해고와 희망퇴직을 강요했다. 그들은 절망감 속에서 한명씩 뿔뿔이 흩어져서 홀로 남게 되었다. 또한 그들이 서로 소외된 또 하나의 원인은 생계를 위해 일용직을 일을 하러 뛰어다니느라 고달픈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징계당한 노동자와 무급휴직당한 노동자들의 고통이 여기에 있다.

" 저는 해고자가 아니고 징계를 당했기 때문에 쌍차의 결정을 기다리느라, 정말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용직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다보니 아직까지도 직업도 없고, 일용직 노가다 밖에 없습니다 (쌍용자동차 징계당한 노동자)."

" 무급휴직자가 460명 정도, 거의 500명 정도 됩니다. 이 사람들의 경우 1년 무급 휴직이라고는 하지만 복직이 정확하게 언제인지, 1년 있다가 정말 복직을 한다는 보장이 없고요. 저희들도 2010년 3월 초에 복귀가 되면 다행인데, 2010년 3월 10일이 복귀날인데, 회사에서는 정확하게 날짜를 정한 것도 아니고,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복직이 아닌, 교육 등으로 계속 돌릴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징계당한 쌍차 노동자)."

" 무급휴직자들은 공장 안에 있는 노조집행부에 속해있지도 못하고, 밖에 있는 박금석 집행부에도 속해있지도 못한 채로 어정쩡한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붕 떠 있다는 거죠. 회사에서 강압적으로 당신이 금속노조든 지부에 가입을 하면 징계를 주고, 인정을 안 해준다라고 합니다. 회사에서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김규환 어용집행부도 그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무급자들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징계당한 쌍차 노동자)."


(2) 옥쇄파업 이후 닥쳐온 생계문제

2009년 8월 6일 이후, 노동자들에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생계의 문제였다. 쌍차 가대위 권지영 동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파업 이후에 가족들의 상황은 가족마다 차이는 있긴 합니다. 남편의 조건에 따라서 다양합니다. 즉 해고가 되거나 희망퇴직을 했거나 무급휴직자가 되었거나 혹은 징계해고가 되거나 징계를 받았거나 등등. 일단 파업에 참여를 했던 노동자들 대부분은 공장 안으로 복귀하지 못한 상태, 즉 8월 6일날 공장에서 나온 이후로 지금까지 5개월이 되도록 공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 래서, 당장 급한 생계 때문에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대리운전을 하거나 아니면 일명 막일이라고 하는 일용직 노동자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고, 아내들도 지금까지 직장생활 안 하던 분들도 급하게 취업을 하고, 그렇지 못하고 일자리를 제대로 구하지 못한 동지들은 방황의 시간을 길게 보내고 있고요. 집사람이 일을 다니고 있으면 남편이 일을 못하고 있는 상태로 좀 괴로워하면서 있어요.

쌍 용차 투쟁 이후에 쌍용차 그만두고 ‘쌍차 나왔다’고 하면서 이력서를 내면 20군데 중에서 한두군데 연락이 올까 말까 합니다. 저의 기억에 중소업체 사장이 ‘쌍차 나온 사람은 쓰지 말자’, 그냥 소위 말하면 ‘시끄러운 사람들이어서’ 라는 게 굉장히 큰거 같아요.

그 렇지 않으면 창업하시는 경우 희망퇴직 하신 분들은 희망 퇴직금 받으신 것하고, 집을 담보로 대출 받으신 것으로 장사를 하시고 그러시는 경우도 있어요. 장사가 잘 안 되서 좀 힘들어 하는 경우도 있고, 자동차공장 정규직 노동자로 있던 예전 생활과 비교하면 상당히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아요. 아직까지는 대출과 빚으로 연명하고 있는 것 같고요.

엊 그제 퇴직자 158명의 퇴직금이 정리가 되었더라구요. 158명 중에 아직 80명은 구속된 상태로 있고, 나머지 60명의 동지들의 퇴직금은 가압류가 되어있어요. 파업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으로 가압류된 퇴직금을 제외하고 가압류되지 않은 액수 정도가 지급이 되었는데, 이걸로 또 당분간 구정연휴 지낼 때까지는 버티겠죠. 그런데 지금 대리운전을 한 200명이 하고 있다고 하니까 아마 그 이후에도 해고자들은 실업급여를 받을 동안 그런 일자리를 전전 할 테고, 무급휴직자들은 그나마 실업급여가 나오지 않으니까 보험설계나 당장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임시방편의 일자리를 계속 찾아 들어가고 있어요. 무급휴직자들과 징계받은 사람들은 일도 손에 안 잡히고, 언제 복귀가 될 수 있을지 초조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고요. 그걸 보는 가족들의 심정도 마찬가지고요. 답답하고 아주 길고 추운 겨울을 보낸다고 그렇게 보시면 될 거 같고요 (쌍용 가대위 권지영).”


(3) 옥쇄파업과정과 그 이후에도 지속된 사측의 탄압으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 우울증의 증대

77일 투쟁 이후, 어떤 이들은 정신적 스트레스와 우울증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다. 또 어떤 이들은 투쟁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아 가슴에 멍조차 들었다. 12월 30일날 송년회에서 한 노동자는 투쟁 이후 우울증으로 고통받았던 날들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 처음에 나오니 10kg정도가 빠졌어요. 살이 너무 빠져도 우울증이 온대요. 1주일 사이에 12kg정도가 빠졌어요. 8월 6일날 나오기 1주일전부터 살이 빠지기 시작하더니, 그 뒤에 우울증이 왔어요. 지금도 치료를 받고 있어요. 8월 8일날 나와서, 뭐라고 할까요? 누워있을 때, 내 몸은 살아있는데 몸이 안 움직이는 것! 놀래고, 우울하고, 밤에 가위가 눌려서 소리도 못 지르고, 계속 그렇게 살다가 집사람이 병원으로 데려갔어요. 병원에 입원해서도 잠을 못 자 수면제를 두세 번 맞고서야 잠을 잤어요. 9시에 수면제 먹고, 10시에 수면제 먹고, 11시 반에 수면제 주사를 맞고, 그래도 잠이 안 와요. 그렇게 해도 새벽 4-5시에 또 깨고......(쌍용자동차 옥쇄투쟁에 참여했던 노동자)"

굴뚝에 올라갔던 비정규직 서맹섭 동지는 더 힘차게 투쟁하지 못한 것에 대해 한이 맺혔다고 했다.

“민 주노총 임성규 위원장이 물을 준다고 왔는데, 경찰이 몰려오니까 대오가 쭉 빠지는 거예요. 그때 내가 한이 맺혔어요. 그렇게 하려면 오지마라! 죽음의 현장은 굴뚝밖에 없었어요. 굴뚝이 죽음의 현장이예요. 내가 굴뚝에서 김봉민 동지에게 딱 80일째 되는 날 (굴뚝투쟁은 86일간이었다.), ‘형, 내가 가겠다! 둘이서 뛰어내려 버리자!’ 라고 말했었어요. 지금도 한이 되어요. 왜 뛰어내리지 못하고 헬기를 타고 내려왔는가?에 대해서......”

사측과 공권력의 탄압은 옥쇄파업이 끝나자 더 심화되었다. 특히, 옥쇄파업에 끝까지 참여했던 노동자들에게 날아온 손해배상통지서는 그들만이 아니라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 손해배상 고지서가 왔는데 애기엄마가 저한테 딱 한마디 하더라고요. 아니 법도 모르는 양반한테 손해배상이 뭐냐? 단지 부부가 이혼할 때 법적으로 이렇게 하는 줄 알았더만, 단지 노동운동 해가지고 손해배상 당하는 것은 억울하지 않느냐? 하면서 애기엄마가 한마디 하더라구요. (쌍용자동차에서 징계당한 노동자)."

이러한 회사 측의 계속적인 폭력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처절하게 투쟁을 시작하고 있다. 옥쇄파업 이후, 노동자들은 어느 업체든지 소위 말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로도 취업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기적인 취업을 포기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들은 행여나 어느 사업체에 비정규직이라도 들어가게 되면, 매인 몸이 되어 쌍용자본에 대항할 수 없기 때문에, 대리운전이나 야간에 할 수 있는 일용직 허드레 일을 하면서, 다시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2. 현장 노동강도와 노자관계

77일 투쟁 이후, 쌍용자동차 현장에는 노동강도가 심해졌다. 작업인원이 줄어든 상태에서 작업속도는 증가했고, 노동자 1인당 작업량은 크게 증가했다.

“공 장 내에는 지금 그 전철의 개찰구있지요? 카드를 찍고 삑삑하는 그런 것과 똑같은 것을 달아놓고 관리카드를 만들어 놔서 그거 찍고 들어가고 나올 때 찍고 나오고, 그러니까 정시인 8시 30분에 일을 시작하고 8시 15분에 출근을 해요. 전에는 버스가 8시 10분에도 오고 15분에도 왔는데 8시 안에 다 들어와요. 아침조회에 참가 안 하면 체크를 하고 불이익을 주겠다 ‘당신이 아니어도 일할 사람이 많다’ 그래요. 강제적이죠. 사실 체조를 하든 안 하든 근무시간이 아닌데, 그건 본인 마음이거든요.

현 장근무자들이 ‘일하는 게 너무 힘들다’라고 해요. 노동강도가 두배로 늘어났어요. 라인속도도 올렸지만 아이템을 더 늘렸어요. 무조건 전 같으면 아이템을 줄이고 인원을 투입하면 사실 그게 일자리 나누기인데, 그게 아니라 인원 투입하지 않고 아이템만 늘리는 거예요. ‘당신 아니어도 지금 대기자가 많아, 그만 둬’ 딱 이 한마디 하는 거예요. (쌍차 비정규직 지회 유제선 동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이러한 노동강도강화는 회사 측이 구조조정을 지속하기 위한 또 하나의 전초전일 것이라고 보고 있다.

“회 사에서 보이지 않게 구조조정을 하고 있다고 해요. 저는 오늘 색다른 것을 많이 들었는데 예를 들면 조립3팀 같은 경우에 지금 22잡(job)을 돌리고 있는데 조만간 15잡을 돌린다고 합니다. 조립3팀은 현재 주간만을 돌리고 있는데 22잡으로 돌리던 것을, 15잡으로 하면 그 인원을 또 빼야 합니다. 그러면 남는 인원들은 또 나가야 됩니다. 지금 회사에서는 그렇게 자꾸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못가는 거죠. 그럼 우리 휴직자들은 기간이 없을 것 같아요. 지금 회사에서는 언론 플레이 하는 거 같아요. (쌍용자동차 징계당한 정규직 노동자)”

“회 사는 지금의 높은 노동강도를 유지하겠다는 거죠. 노동강도를 낮추면 인원을 더 투입해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사측이 현재의 노동강도를 유지하겠다고 하면 인원이 남는 거죠.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히 보이는 것이죠. 인원이 남는다, 제3자 매각해야 되는데 돈이 없다, 제3자에게 잘 보이려면 인원을 줄여야할 수밖에 없겠죠. 그건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속셈이고, 그렇게 아마 흘러갈 것 같예요 (쌍차 비정규직 지회 유제선 동지)”

또한, 노동자의 임금과 복지는 대폭 삭감되었다.

“임 금은 1년 정규직 동지들이 800% 보너스인데 250%를 반납했어요. 550%가 되고 복지가 줄었어요. 사측이 교육비나 의료비 중에 한 가지는 지원해준다고 했는데, 그 외에는 다 중단이 된 거죠. 중단이 되었기 때문에 실제적인 임금은 엄청나게 삭감이 된 것입니다. 비정규직이 받던 연봉이 있는데 그렇게 몇 백%씩 보너스가 삭감되고 실제임금이 삭감되면 과연 노동자들이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마음속에 두려움과 배신과 절망감이 가장 큽니다. 지금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어요 (쌍차 비정규직 지회 유제선 동지).”

한편, 현장 안에 새로 구성된 노동조합은 회사 측의 대변인으로 전락하였다. 현장 안의 노동자들은 사측의 요구에 따라 새로 구성된 노동조합의 어용역할에 분노를 금치 못하고 있다.

“공 장 안에 새로 노동조합이 들어섰지만, 어용노조이기 때문에 조합원들의 어떤 요구도 전혀 들어주지도 않고, ‘회사만 살 수 있다면 우리는 뭐든지 하겠다’라는 식으로, ‘노와 사는 없다. 뭐든지 같이 하겠다.’라고 하면서 노와 사가 구분이 없다라는 걸 노동조합에서 먼저 말하고 있는 거죠. 이것은 노동조합이 아니라 회사의 노무관리 팀인 거죠. 회사의 대변인이 되었죠. 이런 식으로 어용노조가 대놓고 활개치고 있고, 지금 현재 조합원들은 ‘지역별 노조 선거할 때 잘못찍었구나, 우리가 이 사람 찍어주면 회사도 살리고 우리도 어느 정도 노동자로서 권리를 찾아갈 줄 알았는데, 이건 그것도 아니고 우린 똑같이 탄압받고 힘들다’라고 지금 조금씩 후회들을 한다고 합니다. 현장 노동자들은 ‘노동강도가 너무 심해졌다! 견디기 힘들다! 그리고 강제인가가 떨어졌지만 3자매각이 달려있고, 또 다시 구조조정이 올 것이다!’라고 체감을 하고 있어요. 두려움을 많이 느끼고 있고, 그에 대해서 현장의 어용노조가 절대 방어해 줄 수 없다라고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죠. 그것에 대해서 밖에 있는 우리 동지들이 항상 선전을 하고 동지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안에 있는 어용노조가 어떻게 못해도 우리가 끝까지 함께 하겠다! 우리 함께 하자! 호소하고 있어요. 공장 안의 분위기는 사실 좋지 않아요.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라는 정도가 정확한 표현일 것 같아요 (쌍차 비정규직 지회 유제선 동지).”


3. 다시 일어서는 쌍용노동자

(1) 정리해고특별위원회의 구성

옥쇄파 업 이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다시 일어서고 있다. 이용호 정리해고특별위원회 위원장 동지에 의하면, 사측으로부터 정리해고당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정리해고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활동을 재개하였다고 한다. 이용호 동지는 정리해고특별위원회의 큰 목표는 77일 동안의 옥쇄투쟁과 46일 동안의 고공농성 정신을 계승하면서, 공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굽힘없이 투쟁하겠다는 것이다. 이 목표 아래, 첫째 구조조정분쇄, 둘째 비정규직 사수, 셋째 무급휴직자 복귀, 넷째 부정해고자 복직, 이 네가지 목표를 가지고, 지난 2009년 12월 16일부터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고 한다.

정리해 고특별위원회는 정리해고자를 중심으로 되어있으나, 원하청 동지들의 경우 무급휴직된 동지들이나 희망퇴직된 동지들도 다 포괄하고 있다. 이용호 동지는 정리해고 된 노동자들의 생계문제가 해결되면 더 많은 동지들이 투쟁전선에 나설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모든 동지들이 먹고 사는 문제고, 이 문제가 해결되면 더 많은 동지들이 투쟁에 나설 수 있다고 생각해요."

(2) 무급휴직 노동자, 징계당한 노동자, 다시 모이다

무급휴직된 노동자나 징계당한 노동자들이 공장으로 복귀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이들은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들도 곧 투쟁에 합류할 준비를 하고 있다.

" 회사가 약속했던 2010년 3월 안에 저희들이 복직되기는 힘들 것 같아요. 오늘 회사에서 일하시는 노동자들과 만났는데, 그 분들조차도 일을 못하는 상태가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안에 있는 사람들도 나중에 3월달이나 4월달이 되면 일을 못하는 실정이 되는데, 그러면, 우리는 더 못하는 거죠(옥쇄파업에 참가했던 쌍용자동차 노동자).”

“지 금 징계먹은 분들이 100명도 넘게 계신데, 제가 이분들과 함께 만나서 의논을 해 보려고 합니다. 어용노조는 징계가 끝났을 때에도, 우리의 회사복귀를 위해 힘을 써주지 않을 것입니다. 아예 이야기도 없고, 안 하려고 해요. 이제 우리가 다시 모여야 할 시기입니다. (징계받은 쌍용자동차 노동자).”

77일 간의 투쟁 이후에, 8월 6일 노사 간에 결정된 “48:52” 중 52%에 속하여 차라리 정리해고 된 노동자들의 속이 더 편했을까? 오히려, 희망퇴직한 노동자들이나, 무급휴직된 노동자들의 마음이 더 무거웠을지도 모르겠다. 옥쇄파업에 참여했던 모든 동지들은 지난 몇 개월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공권력과 사측의 탄압의 잔해들로 인해 고통을 받았고, 강압적인 실업상태로 인하여 생계가 곤란해지는 고통을 겪었다. 8월 6일 이후, 몇 개월 동안 방황했다는 000동지, 노동조합 집행부에 있으면서 강고한 투쟁을 외쳤으나, 투쟁이 끝나고 좌절감과 스트레스로 우울증마저 겪어야 했던 000 동지... 다들 이제는 강고한 투쟁을 위해 다시 모여들고 있다. 희망퇴직 했던 동지들도 사무실을 찾아오고, 무급 휴직된 노동자들도 매일같이 와서 함께 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2) 옥쇄파업 이후에도 불타오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의지

비정규 직 노동자들은 2009년 쌍차정리해고투쟁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투쟁했었다. 투쟁 이후에도, 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 이후의 상처로 심한 고통을 당했던 시기를 거친 반면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매우 담담하게 옥쇄파업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77일간의 투쟁 이후, 옥쇄파업을 하던 노동자들이 대거 구속당하고, 구속되지 않은 노동자들에게는 정리해고, 무급휴직, 징계 등으로 실업이라는 시련이 닥쳤을 때에도, 제일 먼저 일어서서 투쟁을 시작했던 노동자들은 바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었다고 한다. 쌍차 비정규직 지회 유제선 조직부장은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나가고 있다.

“옥 쇄파업이 끝난 후, 매일 아침 일찍 나와서 ‘구속된 동지들부터 챙기자! 감방 뒷바라지부터 하자' 라는 생각으로 매일 매일 몇 명씩 나눠서 면회도 하고, 우리와 함께 했던 전국의 노동자동지들과 연계를 지속하기 위해서 집회나 투쟁이 있을 때 빠지지 않고 최대한 할 수 있을 만큼 연대투쟁부터 시작하였어요. 옥쇄파업이 끝난 직후의 시기는 매우 어수선한 시기였어요. 무급휴직인원 대 정리해고인원도 나눠지지도 않았던 그런 상황이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먼저 투쟁을 하겠다고 제안을 해서 먼저 일인시위를 하고, 아침에 출근투쟁을 진행하였어요. 그 이후, 정규직 정리해고자를 중심으로 정리해고특별위원회가 만들어지게 되자, 저희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특위소속은 아니고 비정규지회 소속이어서 조직은 틀리지만, 아직 원했던 공동투쟁이 끝난 게 아니기 때문에 정특위 동지들에게 함께 하자! 함께 해야 한다! 라고 먼저 선뜻 이야기 했습니다. 지금도 집회신고를 저희 비정규 지회에서 해요. 그리고 같이 출근투쟁을 하고, 일인시위도 꾸준히 같이 하고 있고, 점점 활동범위를 넓혀 나가고 있는 중이예요. 공장 안에 있는 어용노조는 자기말대로는 ‘독립노조다!’라고 말하는데, 뭐 밖에 있는 쌍차지부에 조합비를 낼 경우, 적발되면 징계하겠다라고 협박을 해서 안에 있는 노동자들이 위축이 되어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함께 하자!'라고 해서 희망퇴직한 동지들과 정리해고당한 동지들 그리고 무급자들 그리고 현장에 있는 노동자들, 이렇게 해서 976명의 정리해고된 분들 중에서 600명 가량은 지금 조합비를 내고 있어요. 저희들은 이후에 이분들과 함께 지부를 새로 구성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1사 1노조의 공동노조를 구성하고자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1사 1노조를 구성하면, 점점 더 투쟁을 확대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어요 (쌍차 비정규직 지회 유제선 동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숫적으로도 매우 적어서, 이들의 투쟁은 중요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투쟁을 위해 생계를 위한 직업도 버렸다. 그야말로 직업적인 활동가, 투사가 된 것이다.

“쌍 용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했던 노동자들 중에서 현재 투쟁하고 있는 분들은 지금도 정규직으로 일하는게 아니라 아르바이트식으로 임시직으로 일하고 있고, 쌍용에 언제든지 들어갈 준비를 하고 계시죠. 그 중에 일부만 다른 곳에 직장을 구하게 되어, 앞으로 쌍용에 못 들어갈 것 같다! 라고 의사표명을 하셨고 나머지 분들은 쌍용에 다시 들어가겠다! 라는 의사표명을 해서 함께 하고 지금도 함께 하고 있고요. 항상 일주일에 1회가 되었든 2회가 되었든 회의 내지는 집회 뭐 이런 거 하고 교육도 하고 그런 거 딱딱하다 싶으면 저녁식사도 해가면서, 또는 사는 얘기도 하면서 앞으로의 투쟁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아직까지 낮은 단계를 하고 있지만 사실 뭐 비정규지회에서 한발 더 앞서서 하려고 항상 노력을 해요. 인원은 적지만 우리의 몫은 해야 한다, 그리고 사실 우리가 2008년 10월 말부터 실시 한 것이고, 정규직 동지들 같은 경우에 12월부터 임금 체불되면서 2009년도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한 것이므로, 저희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먼저 투쟁을 시작했기 때문에 저희가 항상 한발 더 앞서서 솔선수범하자! 해서 먼저 하려고 하고, 하기 전에 제안을 해서 같이 투쟁하고 있습니다. 원하청의 노동자 공동투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국의 동지들에게 이것을 알리고 동지들에게 금속, 그리고 민주노총 동지들에게 ‘쌍차투쟁이 끝나지 않았다!’ 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끝까지 노력하고 있고, 그런 계획을 하나하나 잡아나가고 있습니다 (쌍차 비정규직 지회 유제선 동지).”

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시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생계가 가장 막막하여 활동에 잘 결합하기 어려운 동지들도 있다.

“우 리 비정규 지회의 일부 노동자들도 새로운 직장을 구해서 '미안하다! 처자식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라고 양해를 구하고 활동을 못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그 분들은 오늘도 왔다 가셨어요. 회의나 대집회 있을 때 최대한 오시려고 노력하세요. 대부분 아르바이트를 하세요. 그래서 참석하기가 힘든 건데, 비는 시간에 오려고 많이 노력하세요. 여성조합원들같은 경우에 마트같은 경우에 새벽에도 끝나니깐 만나기가 힘들어요. 최대한 여성 아주머니 조합원들 시간에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쌍용자동차 비정규직 지회 유제선 동지).”

그렇지만, 끝까지 투쟁의 끈을 어떻게 해서든지 부여잡고 있는 비정규직 동지들이다.

“생 계 때문에 조합원들이 매일 매일 출근을 못하고 있어요. 가족들도 있기 때문에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문제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투쟁을 같이 공유하면서 고민하고 조합원들은 당장 알바를 하더라고 상근할 수 있는 동지들이라도 매일 매일 아침부터, 보통 저 같은 경우는 버스를 타고 집에서 아침 5시 반에 일어나서 나오고, 좀 멀리 갈 때는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나오고 저녁 12시에도 들어가고 새벽에도 들어가고 하지만 '해야 된다'라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끝나지 않았다, 우리’라는 마음을 갖고 계속하고 있어요. 지금은 우리가 나와 있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에서 빠지는 사람이 한명도 없어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끝까지 투쟁하게 되는 원동력은 어디에 있는가? 쌍용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인 한윤수 동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 짜 억울해서요. 제 자신은 열심히 사는 인생인데, 그리고 쌍차 안에서도요. 열심히 했어요. 비정규직이지만 기본 최하가 5년 근무를 했어요. 그 안에서도 5년, 7년, 10년, 20년 가까이 다닌 사람도 있어요. 그렇게 열심히 살았던 사람인데, 그래서 노조 생기니까 용케 또 피해서 그때 (고용된 비정규직 노동자가) 1700명에서 지금은 300명까지 떨어졌지만 용케 피해서 살아났어요. 하지만 이번에 2008년도 12월달에 정리해고를 당했을 때에는 피해갈 구멍이 없었어요. 그때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이 억울한 거예요. 솔직히 내가 돈을 더 달라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일했는데 일자리만큼은 보장해 달라는 건데, 그걸 못해가지고, 그게 노동자 잘못도 아니고, 자본의 한계라는 것이 뻔히 보였거든요. 어쨌든 간에 사람이 뭐 우리가 노조의 개념이 있었다 그건 아니거든요. 그건 아닌데, 어떤 사람, 열심히 사는 사람은요, 항상 성실해요. 노조를 해도 성실하고 뭘해도 성실합니다. 열심히 합니다. 자기 신조가 그러니까. 근데 내가 억울한 이 상태에다가 이것만큼은 어떻게 저항은 해보고 싶다! 솔직히 부당하니까 저항하는 것이고, 저항을 할 바에는 어차피 확실히 해보자! 이거지요. 비정규직 자체 싸움이 원래가 힘드니까. 비정규직 자체가 월급이 나오는 거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가 관심을 가지고 투쟁비라도 대주면서 투쟁하는 그런 게 아니예요. (쌍용자동차 비정규직 한윤수 동지)."

쌍용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공장으로의 복귀가 첫 번째 목표가 아니다. 그들에게는 오히려 자본의 부당함. 자본과 노동의 착취/피착취 관계에서 오는 모순을 직감하고 그것을 부수고자 하는 것이다.

“내 가 복귀를 못하더라도, 아예 그럴 바에는 우리 비정규직 싸움이 그래요. 쌍용차요? 정리해고자들은 어떻게든 살아서 나중에라도 복귀하겠지만, 우리는 복귀 안 하니까, 복귀를 안 할 거면 차라리 파산을 시켜버려라! 우리는 거기까지 나가요. 솔직히 아예 파산해라! 우리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그런 거예요. 우리는 끝까지 투쟁하는 것만이 남았습니다 (비정규직 한윤수 동지).”

깨지고, 또 깨지고, 그럼에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또 다시 투쟁을 준비한다.

" 우리는 쉬는 날에도 나오고, 주말에도 나와서 계속 일합니다. 주말에 민주노총 집회도 있고 연대투쟁도 있어요. 지금 제일 주안점을 두는 것은 ‘구속동지 면회투쟁’입니다. 옥쇄파업 이후, 구속된 동지들과 재판을 받는 동지들을 면회하는 것을 제 1순위로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주로 연대투쟁을 많이 가요. 동희오토나 효성, 서울 기륭전자, 용산 뭐 이런 쪽으로 많이 가고 있어요. 일정을 그렇게 잡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알게 모르게 투쟁의 건수들이 많잖아요. 끝까지 하니까 넘쳐나는 거예요. 우리 쌍차가 옥쇄파업을 할 때 연대의 촛불이 여러 개 있었잖아요? 그래서 우리도 할 수 있으면 연대투쟁 할 곳을 다 찾아가는데 그것까지 시간이 안 되요. 진짜요. 그래서 일정을 빼야 되요. 우리는 새벽 6시 7시에 나와서, 일반 조합원은 여섯시 전에 보내야 하지만 우리는 빨리 들어가야 밤 9시 10시예요. 진짜 24시간 중에 15시간 투쟁해요 (쌍용자동차 비정규직 한윤수 동지)."


(3) 쌍용자동차 가대위 동지들의 계속되는 투쟁

쌍용자동차 가대위 동지들도 또 다시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가 대위는 공장에서 파업을 할 때처럼 기동성 있게 아주 규모있고 규칙적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어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생계 문제가 있어서 어렵습니다만, 그래도 최소한에 할 수 있는 부분들을 하고 있어요. 법원 앞에서 가족들이 ‘쌍차 노동자들이 대량 구속된 것은 잘못되었다!’ 라고 하면서 일인시위도 하고 있습니다. 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쌍차의 상황을 알려드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제 겨울이 지나고 날씨가 따뜻해지면, 아이들을 데리고 주말에라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나가려고 해요. 날이 추워서 일인 시위밖에 못해내고 있는데 차츰차츰 할 수 있는 사업들을 조금 같이 가다듬어서 전개하려고 해요. 지금은 주요하게 활동했던 친구들이 언니, 동생, 남편들이 구속이 많이 된 상태라 또 혼자 아이들도 챙겨야 하고 생계도 돌봐야 하고 가계일 활동까지 해야 하는 조건이 어려운 상황이예요. 조금 시간이 지나면 다시 힘을 보태서 촛불집회도 다시 하고 역전에서 100미터 릴레이 투쟁도 하고 그전에 했던 활동을 이어가려고 여러 가지 사업들을 모색 중에 있습니다 (쌍용 가대위 권지영 동지).


(4) 쌍차투쟁은 역사가 되어 우리의 가슴 속에 흐른다.

그 당시 금속노조에 와서 파견근무를 하고 있던 현대자동차 이현수 동지는, 본인 스스로도 79일 동안 쌍차투쟁을 해왔다고 자부하며, 쌍차투쟁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21 년 동안 노동운동을 했던 노동자로서, 쌍차투쟁을 보면서 77일이라 하지만 전 79일간이었는데, 그동안에 제일 기억에 남았던 사람은 쌍차노조 한상윤 지부장입니다. 그렇게 강하게만은 보이지 않았던 그 사람이, 바로 오늘인 2009년 12월 30일날까지 그렇게 강하게 제게 큰 산으로 다가왔고, 산맥으로 느껴졌던 사람이고, 운동하는 사람들 중에서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사람이 있는데 고립되었던 옥쇄파업 동안 <미디어충청>의 정재은 기자라고, 가장 인상 깊게 봤던 여성 동지, 몸무게가 45킬로도 안 나가던 그 동지가 마지막 제의를 뿌리칠 때, 저보다도 크고 뭐든지 크다고 느껴졌어요. 그 두 동지를 바라보면서 제가 운동에 대한 관점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정 동지는 마지막에 현장을 떠나지 않겠다던 마지막 한마디가 아직까지도 눈에 훤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쌍차투쟁을 떠올리면, 그 두 사람을 가장 가슴 깊게 느끼고요, 앞으로 제 인생에서 제 몸속에 가시로, 채찍으로 여기고 생활할 것입니다. 큰 도움이 될 거고, 제가 힘들 때 아마 올곳이 설 수 있는 그런 역할을 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현대자동차 이현수 동지)."

쌍차투쟁은 이렇게 노동자들의 가슴 속에 시퍼렇게 살아서 숨쉬고 있다.


(5) 제2의 쌍용자동차 투쟁이 들불처럼 번지리라

" 이제 용산도 이겼고, 그 다음에 우리 쌍차 노동자들이 정말 억울한 사람들이 많으므로, 이제 쌍차투쟁이 다시 시작되어야 하지 않는가? 생각해봅니다. 우리 쌍차는 현재 진행 중입니다만, 정말 그냥 현재 진행이 아닌 정말 뼈아픈 현재 진행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용산참사투쟁 못지않는 제2의 쌍용차 투쟁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싸울 겁니다. (옥쇄파업에 참여했던 쌍용자동차 노동자).”

쌍차 노동자들의 투쟁은 현재 진행 중이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끝까지 투쟁할 것이다. 이제 그들은 다시 일어서고 있다. 쌍용자동차 옥쇄투쟁이 역사에 길이 남을 이유는 바로 자본에 대해 비타협적인 투쟁을 끝까지 수행했다는 것에 있다. 옥쇄투쟁 동안 자본과 국가의 폭력에 맞서서 거침없고 의연하게 투쟁을 전개했던 그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지 않은가? 2009년 공황의 초반부터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총노동대 총 자본의 대격전을 치뤘다. 그들은 목숨을 건 투쟁을 통해, 자본과 노동의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적대를 만천하에 폭로했다. 투쟁을 회피하고 협상을 구걸하는 민주노총 지도부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노동자는 하나라는 계급의식을 고양시켰다. 그렇게 그들은 노동운동의 새로운 기풍, 새로운 지도력의 탄생을 알렸다. 지금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시련은 또 다시 투쟁을 시작하기 위해 더욱 단단해지는 과정일 것이다.

올해 2010년에 세계공황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전선은 더욱 넓어지고 격돌은 더욱 치열해 질 것이다. 더 많은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내몰릴 것이다. 쌍용차노동자들이 보여주었던 불굴의 투혼은 일어서는 노동자들을 격려해 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야만 하는 길, 승리의 길로 안내할 것이다. <노사과연>


1) 산 자들 중 백여 명이 '이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라고 끝까지 싸우다가 징계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 산 자 중 34명이 징계해고를 당했는데, 2차 재심까지 한 명도 구제가 안 되고 전부 다 해고가 되었다고 한다 (징계당한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