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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전쟁/리뷰 & 보도

[리뷰] 쌍용자동차 투쟁은 이제야 시작되고 있다 - 이택광


쌍용자동차 투쟁은 이제야 시작되고 있다
[이택광의 영화읽기] 쌍용투쟁 다룬 다큐멘터리 <당신과 나의 전쟁> 리뷰

※<샘터분식>, <필승! ver2.0 연영석> 등을 만들며 개인의 이야기와 사적 다큐멘터리로 새로이 방향을 트는 듯했던 태준식 감독이 또 다시 '투쟁 다큐멘터리'로 돌아왔다. 쌍용자동차 투쟁을 통해서다. 77일간 파업을 벌이다 진압당하고 만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당신과 나의 전쟁>이 여러 사회단체의 협조를 받아 정식 극장개봉이 아닌 공동체상영 형식으로 상영을 시작했다. 본지 고정필자인 이택광 경희대교수가 <당신과 나의 전쟁>을 보고 리뷰를 보내왔다. - 편집자 주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돌아왔다. 77일간 옥쇄파업을 벌이다가 무참하게 진압 당했던 그 한때의 시간이 고스란히 다시 돌아왔다. <당신과 나의 전쟁>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바로 그것이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공장을 폐쇄하고 농성을 벌일 때 많은 사람들은 그 이유를 궁금하게 생각했다. 어떤 이들은 노골적으로 노조의 이기주의를 꼬집었다. 정부와 보수언론은 시대착오적인 파업을 멈추라고 종용했다. 심지어 진보진영에서도 노동자를 위해 이기적인 파업을 중단하라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각자가 주장하는 진실들은 달랐지만, 진정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은 드물었다.
 
▲ <당신과 나의 전쟁>은 현재 일반 극장에서 개봉이
아닌 공동체 상영의 형태로 곳곳에서 상영되고 있다.

<당신과 나의 전쟁>은 이런 궁금증을 풀어주려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를 지배하는 것은 로고스라기보다 파토스이다. 보는 내내 관객은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울분을 어쩔 수 없다. 이 울분은 비참한 현실을 어떻게 하지 못하는 무기력증 때문이다. 마음이 여린 관객이라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훔칠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이 영화가 감정과잉을 유도하는 것은 아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섣부른 선동을 처음부터 배제한다. 오히려 사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기 때문에 관객은 더 강렬한 공감에 빠져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음악은 냉정하고 맹목적 감정이입을 가로막는 장치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가혹한 파업환경이었기 때문에 영상촬영분도 충분하지 않았을 텐데, 마치 퍼즐을 맞추듯이 드문드문 찍은 영상들을 발굴해서 배치한 것은 편집의 수고라고 하겠다. 온전한 이야기는 이미 세상에 나와 있다. 필요한 것은 그 이야기의 뒷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영화는 이런 측면에서 당시 우리 쪽에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에 대한 숨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서 있던 그 자리에서 우리 쪽을 보는 시선들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다.

다큐멘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제목에서 명백하게 제시된다. '당신과 나의 전쟁'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은 쌍용자동차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
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게다가 이것은 전쟁이다. 무슨 전쟁인가? 자본가와 노동자의 전쟁을 일컫는 것일까?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노동자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어차피 쌍용자동차는 자본가들도 포기한 기업이었다. 이 기업을 살려보겠다는 것이 노동자들의 요구였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해고였다. 파업이 끝난 뒤에 쌍용자동차 정문에 다시 모인 노동자들은 출입구에 설치된 전자감지장치를 보고 개탄한다. 과거보다 더 철저하게 노동현장을 통제하는 시스템이 도입된 현실에 이들은 절망한 것일까?

자본가 들이 나쁜 사람들이어서 이런 짓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순진하다. 정확히 말하면 자본가들도 어떻게 할지를 모르고 있을 뿐이다. 쌍용자동차 투쟁이 한창일 때 정부관계자가 했던 말이 있다. 쌍용자동차 해소는 세계자본주의의 법칙이기 때문에 정규직 완전고용을 주장하는 좌파의 주장은 공상이라는 취지였다. 경제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런 판단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어렵다. 세계자본주의는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대세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이 흐름을 거스르는 선택을 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결국 정부관계자가 더 정확하게 현실 판단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인데, 과연 그럴까?

이 다큐멘터리는 이런 '현실주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중요한 것은 쌍용자동차 투쟁이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성취 없이 종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루쉰의 아큐처럼 '정신승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쌍용자동차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할 지점에서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파업투쟁과 달랐다. 이들은 무엇을 포기하지 않았는가? 바로 '시민'으로서 자신들이 누려야할 지위이다.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시민이라는 사실을 주장했던 것이 이들의 파업이었다. 노동자들이 마침내 자신들을 시민이라고 말하기 시작했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사회는 그동안 보이지 않던 노동자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시민의 지위를 요구하는 이 노동자들은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구호를 외치고 운동권 가요를 부르는 과격집단으로 뉴스와 신문에 출몰했다.

 
▲ <당신과 나의 전쟁>

역설적으로 쌍용자동차 투쟁은 노동자에게 시민의 지위를 부여하지 않으려는 한국 사회의 무의식을 적나라하게 폭로했다고 할 수 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주장한 것은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가족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쌍용자동차라는 '기업'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공동체를 유지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공동체를 지탱하는 윤리는 '쌍용가족'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런 소망은 회사에서 주입한 이데올로기를 순진하게 신봉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일방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주입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원하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 이데올로기를 스스로 만들어낸다.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는 자본 자체의 것이라기보다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작동하는 자본주의에서 조금이나마 행복해지기 위해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자본 주의는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인간성을 파괴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파괴가 국가나 사회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국가나 사회는 자본주의와 갈등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쌍용자동차라는 회사가 노동자를 정리해고하면 회생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자본주의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쌍용자동차를 워크아웃하는 것이 자본주의 대세이기 때문에 그 원칙에 따라야한다는 주장은 그럴 듯하지만, 결과적으로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투쟁을 정당화해주는 말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정리해고 노동자들과 같이 싸우지 않고 회사 측에 섰던 노동자들도 이제 해고의 위기에 직면하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정부관계자와 보수언론들이 누구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드러난다. 이들은 지금 자본주의의 대변인 노릇을 자처하지만, 자본에게 대변인 따위는 필요 없다. 정부관계자와 보수언론들, 심지어 한국의 자본가들도 세계자본주의의 입장에서 본다면 언제 꺼질지 모르는 풍전등화이다.

현실 파악을 하지 못하는 쪽은 오히려 이들이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싸운 대상은 자본가도 아니고, 정부관계자도 아니고 보수언론들도 아니다. 가족과 함께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지위를 박탈하는 세계자본주의라는 절대적 시스템에 브레이크를 걸고 나선 것이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었다. 이런 까닭에 이 전쟁은 단순하게 쌍용자동차 노동자들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전쟁은 77일간 옥쇄투쟁에서 끝난 것이 아니다. 2010년 3월 현재 금호타이어도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쌍용자동차 투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시작되고 있을 뿐이다. <당신과 나의 전쟁>은 그 시작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상세하게 보여주는 감동적인 보고서이다.

 

이택광 문화평론가 · 경희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