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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전쟁/리뷰 & 보도

[리뷰] 2009 쌍용차 옥쇄파업과 2001년의 기억

* 조병훈님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원문을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





태준식 감독의 연영석 2.0을 텅 빈 인디스페이스에서 기억이 있다. 연영석 때는 내용은 부드럽지만 말투는 모서리가 좀 거칠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번엔 그 반대였다. 말투는 소프트해졌고, 내용은 부글부글 끓는다. 아직도 기억 속에는 부평 대우차 구조조정을 다룬 MBC 스페셜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당신과 나의 전쟁>을 보는 내내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포스터에는 흘림체로 "잊지 않겠다고 말해줘"라고 적혀있다. 나는 이 문장이 싫다. 잊지 않는 것이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인터넷에서 다른 리뷰를 찾아보니 다큐를 본 사람들이 '그들의 전쟁'이 아닌 '당신' 또는 '우리'의 전쟁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그 '당신'과 '우리'가 좀 모호한 것 같다는 생각이다.


정보량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PD수첩의 검찰 성상납 폭로를 누구도 새로운 뉴스라고 생각하지 않듯, 일방적인 구조조정과 옥쇄파업, 그리고 폭력진압을 누구도 모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관심있게 보지 않고, 힘을 들여 동감하지 않았을 뿐이다.


리뷰를 적어본다.



<당신과 나의 전쟁>을 보았다. '쌍용차 옥쇄파업'에 대한 기사를 보긴 했지만, 전달되는 팩트가 너무 적어 제대로 현장을 떠올리기 힘들었다. 언젠가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외치는 시위를 찾아갔을 때, 열 명 남짓의 시위대를 사방으로 봉쇄해서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아닌 경찰의 사열을 관람하게 된 적이 있었다. 더 이상 제도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순간에 생각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 시위다. 마지막 방법이 압도적으로 무력화했을 때의 절망감은 우울함이 깊어 자살에 이르는 절망과 같다. <당신과 나의 전쟁>을 보는 내내 절망에 휩싸였다. 그리고 2001년이 떠올랐다.

 

2001년 부평에서는 이번 평택 쌍용차와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아이엠에프의 마지막 폭풍 격으로 대우자동차가 1750명을 해고하는 초유의 대규모 정리해고를 실시했고, 이에 반발한 대우차 노동자들이 역시 옥쇄파업을 벌였다. MBC스페셜을 통해 방영된 당시의 파업은 가족들이 들어가서 노동자들을 격려하고, 파업 노동자들 개인의 삶을 드러내면서 반향을 얻었다. 당시 대학 새내기였던 나도 대우차 사건을 보면서 친구들과 노동환경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우차 사건은 우리들에게 일종의 트라우마였고, 그 충격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당신과 나의 전쟁>을 보면서 나는 선명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현실이 아니라 기시의 세상일지도 모른다는 환각을 일으켰다. 비판여론에도 불구하고 강행되는 거대한 개발 정책, 예민해지는 시민의 반응, 공포의 조성을 통한 언로의 통제, 체제를 이탈하는 젊은이들. 우리는 모두 잔인한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멕시코 소설의 고전 '뻬드로 빠라모'의 메시지처럼 잔인한 과거가 하나씩, 그러나 빠른 속도로 재현되고 있었다. 이어서 나는 묵직한 공포를 느꼈다. 이런 일들이 계속되었을 때, 사람들은 더 극단적인 방법으로 우울을 표출해왔다. 내 눈 앞에는 순식간에 경기도 광주 대단지 사건, 부마항쟁, 5월 광주, 줄을 이었던 열사들의 분신과 바로 작년의 용산이 떠올랐다. 내가 너무 예민해진 것이 아닐까? <당신과 나의 전쟁>을 보면서 나는 몇 번이나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아직도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다. 사람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나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자본주의를 포기할 수는 없고, 노동환경은 개선해야 하지만 지금 같은 위기가 왔을 때는 누군가는 희생된다는 논리가 반복될 뿐이다. 위기를 극복하면 더 나아지지 않겠느냐 라는 이 논리를 언제까지 반복해야 하는 걸까. 게다가 그 말대로 경기가 주기적이라면 다시 위기가 올 때는 어쩌란 말인가. 다시 희생해야 하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혁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억울하게 당하는 것에 너무 오랫동안 내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노동자 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강도 높은 폭압에 어떤 내성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상처를, 동료의 상처를 ‘쉽게’ 이겨 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길러도 고통이 가슴 깊은 곳을 찌르는 역치의 순간이 있다.

 

사회의 폭력성과 선정성이 도를 지나쳐도 사람들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은 웬만한 충격은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미치지 않고 살 수 있을 만큼 자극의 역치가 굉장히 높게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말하는 사회화는 그 역치를 높이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 사회의 젊은이들은 그렇게 훈육되어왔다. 그 까닭에 기업의 노동환경과 노동쟁의의 무력한 결과는 이러한 폭압의 내성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투쟁은 막다른 골목에서 생겨난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노동운동이 국가경제를 파탄낼 만큼 투쟁만을 외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국가경제가 도저히 노동을 지속시킬 수 없을 때 현장의 투쟁은 시작된다. 즉, 노동환경의 심각한 문제가 노동운동을 만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경우, 사측과 국민여론 역시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몰고 가는 시점인 까닭에 노동운동은 보통 외로운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보통은 무관심 속에 쓰러진다.

 

진압의 끔찍함 만이 선정적으로 유포되는 것이 지속적인 관심을 끌지 못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또한, 파업현장의 휴머니즘이 파업당사자에게 혐의를 몰아 씌우는 행태를 막지 못한다는 것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요컨대 결론이 이미 결정된 상황에서 대응하는 방법은 안타까운 배수진일 뿐이다. 평택 쌍용자동차 옥쇄파업 투쟁이 사무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사회 전체가 그 결론에 굴복한 다음 노동자들은 자본가가 아니라 사회 전체로부터 쫓겨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당해도 우리는 당하고 있다는 것을 빨리 잊는다. 하기야 내일 당한다고 생각한다면 아침에 눈을 뜨고 싶지 않을 것이다. 당하는 것이 두 번이면 칼을 갈지만, 그 칼이 아주 쉽게 무력해지면 인간의 두뇌는 당한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 노력한다. 희망이라는 태도를 이용해서 인간을 파멸로부터 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억울하게 당하는 상황은 결코 익숙해질 수 없으며, 희망은 일정한 진전을 통해 지속되는 법이다. 변화 없는 상황은 희망마저 없애고, 자멸만을 기다리게 된다.

 

주어진 환경에서 열심히 살면,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기대는 애당초 하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바로 이 모호한 명제 때문에 착한 사람들이 당하는 구조가 탄생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희망이 그동안 우리가 지탱할 수 있는 힘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의 노동환경과 희망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믿을 수 없이 끔찍한 일이 정확히 9년 만에 일어났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무작정 내일만을 희망하는 한.